시대극 사극 조선시대

[1화: 역병과 마주한 의원]

조선 중기, 끔찍한 역병이 한양을 덮쳤다. 거리에는 신음과 곡소리가 가득했고, 백성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용한 의술로 이름 높던 젊은 의원 강이현은 밤낮으로 병자들을 살피며 사투를 벌였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희미한 희망의 불씨가 살아났다.

하지만 역병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궁궐의 높은 담장마저 넘어섰다. 특히 왕실의 가장 중요한 인물, 세자 저하마저 사경을 헤매게 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당대의 명의들이 모두 동원되었지만, 차도는 없었다. 초조해진 김대감을 비롯한 권세가들은 결국 궁궐 밖의 의원들에게까지 눈을 돌렸다. 백성들 사이에서 ‘기적의 의원’으로 불리던 강이현에게 입궐 명령이 내려진 것은 그때였다.

궁궐 안은 겉보기와 달리 죽음의 기운이 감돌았다. 호화로운 전각 곳곳에서 환자의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의관과 내의녀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강이현은 낯선 엄숙함과 긴장감 속에서 세자가 있는 동궁전으로 향했다.

세자는 창백한 얼굴로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역병의 고통 속에서도 무언가를 애써 움켜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강이현은 조심스럽게 진맥을 시작했다. 그때, 세자의 손에 들려 있던 무언가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누군가에게 숨기려 했던 듯, 작게 접힌 서찰 한 통이었다. 강이현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단순한 물건이 아님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서찰을 집어 드는 순간,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2화: 금지된 서찰]

문밖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강이현은 화들짝 놀랐다. 세자의 손에서 막 집어 든 서찰을 품속 깊이 숨겼다. 이내 문이 열리고 들어선 이는 김대감의 최측근이자 세자 주변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내관이었다. 그의 눈빛은 세자의 병세보다는 강이현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더 날카롭게 꽂히는 듯했다.

“세자 저하의 용태는 어떠하오, 의원?” 내관의 목소리에는 걱정보다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강이현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맥을 짚었던 손을 거두고 답했다. “아직 위중하시나, 가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는 말을 흐리며 내관의 시선을 피했다. 서찰을 숨긴 가슴께가 죄어오는 듯했다.

내관은 잠시 강이현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다가 세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별다른 말 없이 물러섰다. 그의 싸늘한 시선이 사라지고 나서야 강이현은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밤이 깊어지고 궁궐의 적막함이 내려앉았을 때, 강이현은 몰래 품속의 서찰을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펼쳐든 서찰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수십 년 전 폐위되어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왕비가 살아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폐비의 존재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숨겨진 진실의 조각들이 적혀 있었다.

강이현은 서찰을 읽는 내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미천한 의원에 불과한 자신에게 조선 왕실의 가장 깊숙한 비밀이 쥐어진 것이다. 이 비밀은 현재 권력을 장악한 세력의 근간을 뒤흔들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이 이 서찰을 본 순간, 이미 거대한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바로 그때, 동궁전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서찰의 존재를 눈치챈 것일까? 혹은 강이현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위협 속에서 강이현은 서찰을 다시 품에 숨기며 탈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숨 막히는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3화: 그림자 속 조력자]

동궁전 문밖에서 들려온 다급한 발소리에 강이현은 얼어붙었다. 서찰을 품에 꼭 숨긴 채 문을 주시하는데, 이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낯선 인물이 들어섰다. 예상했던 김대감의 수하가 아니었다. 초라하고 늙은 궁녀 한 명이었다. 그녀는 강이현을 훑어보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

“세자 저하께 오신 분이오? 허면, 혹… 전하께서 손에 쥐고 계시던 그것은 보셨소?”

강이현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 늙은 궁녀가 서찰의 존재를 알고 있단 말인가? 그녀의 깊고 알 수 없는 눈빛 속에는 세월의 고단함과 함께 숨겨진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매화’라 소개하며, 이 궁궐에서 아주 오래, 많은 것을 보아왔다고 덧붙였다.

매화는 강이현에게 세자의 병세가 아닌, 그가 손에 쥐었을 ‘비밀’에 대해 에둘러 물었다. 강이현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매화는 그의 떨리는 눈빛과 움츠린 어깨에서 진실을 읽어낸 듯했다.

“모든 진실에는 그림자가 따르는 법이오. 그림자에 집어삼켜질 것인가, 아니면 그림자를 이용할 것인가는… 오롯이 당신의 선택에 달렸소.” 매화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는 강이현에게 작은 약첩 하나를 건넸다. “세자 저하께 도움이 될 수도, 혹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일 수도.” 그녀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조용히 동궁전을 나섰다.

매화의 등장으로 강이현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녀는 누구이며, 왜 그에게 접근한 것일까? 조력자인가, 또 다른 감시자인가?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위험한 궁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는 세자의 치료에 필요한 약재를 구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궁궐 밖으로 나설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이미 김대감의 내관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궁궐의 문을 나서는 강이현의 등 뒤로 김대감의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다.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듯했지만, 강이현은 자신이 거대한 사냥의 대상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때, 어둠이 짙게 깔린 한양 거리의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 그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4화: 그림자 사냥]

강이현은 세자에게 약재를 구하러 간다는 핑계로 간신히 궁궐의 문을 나섰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찔렀지만, 그보다 더 날카로운 위협이 그의 등 뒤를 짓누르는 듯했다. 김대감의 내관이 자신을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냈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이미 자신이 쫓기고 있음을 직감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한양의 거리는 낯선 위험으로 가득했다. 인기척이 드문 골목길을 따라 재빨리 움직이며, 강이현은 혹시 모를 추격을 따돌리려 애썼다. 그의 심장은 품속에 숨긴 서찰처럼 뜨겁게 뛰었다. 이 작은 종잇조각이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동시에 거대한 진실의 문을 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간신히 인적이 드문 낡은 창고 뒤편에 몸을 숨긴 강이현은 조심스럽게 서찰을 다시 꺼내 들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서찰에 적힌 내용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폐비의 생존, 그리고 그녀가 숨어 지내고 있다는 단서를 암시하는 몇 개의 지명과 암호 같은 글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특정 시장통의 낡은 주막이나 한밤중의 다리 이름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서찰의 내용을 곱씹으며 다음 행보를 정하려는 순간, 창고 밖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분명 자신을 추격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그의 은신처를 발견한 것이다. 강이현은 서찰을 다시 품에 숨기고 몸을 일으켰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창고의 유일한 출입구를 막아선 듯했다.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번뜩였다.

[5화: 도피와 첫 번째 단서]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칼날이 강이현의 목을 겨냥했다. 그는 미천한 의원일 뿐, 무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필사적으로 몸을 날려 칼날을 피했지만, 날카로운 쇳소리가 귓가를 갈랐다. 창고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강이현은 본능적으로 가장 가까운 구석으로 내달렸다.

추격자들은 매서웠다. 김대감의 수하들임이 분명했다. 그들은 서찰의 존재를 눈치채고 그를 제거하거나 서찰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강이현은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낡은 창고에는 먼지 쌓인 잡동사니들만이 가득했다. 그는 의원으로서의 기민함과 극한 상황에서의 생존 본능을 총동원했다. 한쪽 구석에 쌓인 들것들을 발로 차 넘어뜨려 시야를 가리고, 그 틈을 타 다른 방향으로 전력 질주했다.

간신히 창고의 작은 뒷문으로 몸을 던진 그는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뒤에서는 추격자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지만, 두려움과 긴장으로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숨 가쁘게 달리며, 그는 품속의 서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구겨지고 찢어질세라 소중하게 움켜쥔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위험이었다.

그는 서찰 속의 단서를 떠올렸다. ‘달빛 아래 묵은 주막’, ‘세 갈래 길목 다리’. 지금은 서찰을 읽을 시간도, 곰곰이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인적이 드문 골목을 택하며 발길을 옮기던 강이현은 문득 서찰에 언급된 ‘묵은 주막’이 어디일지 떠올리려 애썼다. 한양의 시장통에 그런 이름의 낡은 주막이 있었던 것 같았다.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대로는 잡힐 터였다. 강이현은 숨을 헐떡이며 방향을 틀어 시장통 쪽으로 향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겨우 낡은 시장통 어귀에 다다른 그는 서찰의 첫 번째 단서인 ‘묵은 주막’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희미한 달빛 아래, 허름한 기와지붕의 주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막 앞으로 다가섰다. 그때, 주막의 어두운 처마 밑에서 그림자처럼 서 있는 누군가의 형체가 보였다. 강이현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저자는 누구인가? 자신을 쫓는 자들인가, 아니면…?

[6화: 그림자의 속삭임]

주막 처마 밑 그림자 속의 인물은 늙고 수척한 사내였다. 강이현은 숨을 죽이고 상대를 살폈다. 사내는 그의 누추한 행색과 겁먹은 눈빛을 잠시 보더니,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물었다. “찾아오실 줄 알았소… 허나 그대가 올 줄은 몰랐는데.” 그의 말은 서찰의 내용을 아는 듯했다. 그는 강이현이 품은 비밀을 어렴풋이 짐작하는 눈치였지만, 적대적인 기색은 아니었다.

바로 그때, 멀리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저기다!”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김대감의 수하들이 강이현을 발견한 것이다. 늙은 사내는 당황한 기색 없이 강이현의 팔을 잡아 주막 안으로 끌어들였다. “이리로! 시간이 없소!” 주막 안은 어둡고 비좁았지만, 사내는 능숙하게 강이현을 안내했다. 그는 주방 구석의 낡은 찬장을 밀어 비밀 통로를 열었다. “이 길로 가면 개울가로 나갈 수 있소. 그리고…” 사내는 강이현의 손에 작게 접은 종이 한 장을 쥐여주었다. “달빛 아래 세 갈래 길목 다리. 그곳에서 다음 길을 찾으시오.” 그의 눈빛은 간절함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강이현이 숨 가쁘게 물었다. 사내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오랜 그림자일 뿐이오. 조심하시오. 누구도 쉽게 믿어선 안 되오.” 추격자들이 주막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강이현은 더 물을 새 없이 몸을 숙여 비밀 통로로 뛰어들었다. 어두컴컴한 통로를 기어가며, 그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늙은 사내는 과연 누구인가? 그가 건넨 종이에는 무엇이 적혀 있을까? 그리고 ‘세 갈래 길목 다리’에서는 또 어떤 위험이나 진실이 기다릴까? 강이현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어둠 속 개울가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 뒤로, 추격자들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7화: 달빛 아래의 다리]

개울가 축축한 땅 위로 몸을 던진 강이현은 차가운 공기를 폐부 가득 들이마셨다. 낡은 주막의 비밀 통로는 퀴퀴한 냄새와 함께 그를 또 다른 어둠 속으로 내몰았다. 뒤에서는 여전히 김대감 수하들의 고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품속에 쥔 작은 종이 조각을 떠올렸다. 늙은 사내가 건넨 그것에는 ‘세 갈래 길목 다리 아래, 달빛이 비추는 곳’이라 적혀 있었다.

세 갈래 길목 다리는 한양의 외곽,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낡은 석교였다. 밤이 깊어 누구도 없을 그곳이라면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행보를 생각할 수 있으리라. 강이현은 몸을 일으켜 다리가 있는 방향으로 전력을 다해 달렸다. 어둠과 두려움 속에서, 오직 품속의 서찰과 작은 단서 조각만이 그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달빛이 옅게 비추는 자정 무렵, 마침내 세 갈래 길목 다리에 다다랐다. 낡은 돌다리는 세월의 이끼가 앉아 있었고, 아래로는 개울물이 고요히 흘렀다. 강이현은 숨을 헐떡이며 다리 아래로 내려갔다. 서찰의 내용처럼, 달빛은 정확히 다리 교각 아래 한 부분을 비추고 있었다. 그곳은 마치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표시된 듯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달빛이 비추는 곳의 돌들을 살펴보았다. 마침내 다른 돌들과 달리 살짝 들려 있는 돌 하나를 발견했다. 손가락으로 틈을 벌려 힘겹게 돌을 들어 올리자, 그 아래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강이현은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이 상자 안에 서찰에 담긴 진실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가 들어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다리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는 것을 직감한 강이현은 상자에 닿으려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래, 검은 그림자 같은 인물이 다리 난간에 기대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누구인가? 추격자인가, 아니면…?

[8화: 상자 속 진실과 또 다른 그림자]

다리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림자의 형체에 강이현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추격자인가? 아니면 매화 부인이나 주막 사내처럼 또 다른 조력자 혹은 시험자인가?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림자는 천천히 난간에서 몸을 떼고 다리 아래로 내려왔다. 가까이 다가선 인물은 예상치 못하게 젊은 여인이었다. 얼굴은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품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가… 서찰을 쥔 자인가? 어찌 그 손에 폐비마마의 상자가 있단 말인가.”

강이현은 숨을 멈췄다. 그녀는 서찰과 상자, 심지어 폐비의 존재까지 알고 있었다. 이 위험한 비밀을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자들인가? 강이현은 무릎을 꿇고 있는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인은 성큼 다가와 그의 발치에 놓인 낡은 나무 상자를 쏘아보았다.

“그 상자는… 아무나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네놈이 뭔데 감히…” 여인의 목소리에 적의가 짙어졌다. 강이현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도망칠 수도 없었고, 상자를 순순히 내줄 수도 없었다. 상자 속에는 자신의 목숨을 건 진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저는… 세자 저하를 진료하던 의원입니다. 우연히 서찰을 얻게 되었고… 단서를 따라 이곳까지 왔을 뿐입니다.” 강이현은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그의 눈빛은 진실을 갈구하고 있었다.

여인은 잠시 강이현의 얼굴을 살피더니,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우연이라… 믿기 어렵구나. 허나 네 눈빛에 거짓은 없어 보이는군.” 그녀는 한 발자국 더 다가서며 말했다. “좋다. 상자를 열어보아라. 그리고 그 안의 내용이 네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게 말해 보아라. 만약 네 판단이 틀리다면… 너의 목숨은 여기서 끝이다.”

목숨을 건 시험이었다. 강이현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들어 올렸다. 상자는 낡고 단단했다. 조심스럽게 잠금쇠를 살피자, 숨겨진 걸쇠가 보였다. 그것을 누르자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상자 안에는 몇 점의 낡은 물건과 함께, 한 장의 비단 조각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비단 조각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강이현이 그것을 집어 드는 순간, 여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것은…!”

바로 그때, 멀리서 수많은 횃불이 어둠을 가르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김대감의 추격자들이 다리 아래까지 쫓아온 것이다. 여인은 재빨리 비단 조각에 시선을 고정했다. 강이현 역시 비단 조각의 내용을 읽으려 애썼지만, 횃불 빛이 가까워지면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여인은 결정한 듯 강이현을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상자와 비단 조각을 놓고 도망쳐라! 어서!”

[9화: 비단 조각의 비밀]

횃불의 물결이 어둠을 가르고 빠르게 다가왔다. 김대감의 수하들이다. 그들은 다리 아래, 달빛이 비추는 강이현과 정체불명의 여인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왔다. 여인은 강이현에게 상자와 비단 조각을 버리고 도망치라 명했지만, 강이현은 이미 비단 조각에 새겨진 글자에 시선을 빼앗긴 상태였다. 흐릿한 달빛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들은 단순한 단서가 아닌, 마치 암호처럼 보였다.

“이것은… 대체 무엇이오?” 강이현은 비단 조각을 움켜쥐며 물었다. 여인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은 그것을 해독할 때가 아니다! 어서 달아나라!” 그러나 강이현은 진실에 대한 갈망과 생존의 본능 사이에서 망설였다. 이 비단 조각이 자신이 처한 위협에서 벗어날 유일한 열쇠일지도 모른다.

추격자들의 그림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강이현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비단 조각을 품속 깊이 쑤셔 넣었다. 여인은 그의 행동을 보고 잠시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추격자들이 몰려오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내가 시선을 끌 테니, 자넨 개울을 따라 하류로 도망치시오!” 그녀의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실려 있었다. 그녀는 검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추격자들 사이로 뛰어들었고, 순식간에 칼날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인이 만들어준 찰나의 기회였다. 강이현은 그녀의 외침대로 몸을 돌려 개울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물이 온몸을 감쌌지만, 그는 뒤돌아볼 새도 없이 필사적으로 헤엄치고 달렸다. 추격자들의 고함 소리와 여인의 싸움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간신히 개울가를 벗어나 인적 드문 숲 속으로 숨어든 강이현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숨을 헐떡이며, 그는 품속의 비단 조각을 다시 꺼내 들었다. 구겨진 비단 조각에는 여전히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매화 부인도, 주막 사내도, 그리고 방금 자신을 구해준 의문의 여인도 곁에 없었다. 그들은 모두 그림자처럼 나타나 단서를 던져주고 사라졌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오직 이 작은 비단 조각뿐이었다. 그는 비단 조각을 노려보며 해독하려 애썼다. 그리고 희미하게 새겨진 몇 개의 글자와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특정 장소를 가리키는 듯했다. 한양 외곽의 낡은 절? 아니면… 폐비가 숨어 지내고 있다는 단서의 장소인가?

강이현은 비단 조각에 담긴 의미를 깨닫는 순간, 자신이 마주해야 할 진실의 무게와 다가올 위험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도망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이 비단 조각이 가리키는 곳, 그곳에 폐비가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 진실이 있다면… 그는 가야만 했다. 추격자들은 여전히 그의 뒤를 쫓고 있을 터. 비단 조각의 비밀을 풀고 다음 행보를 결정해야 했다. 과연 비단 조각은 그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그리고 그곳에는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10화: 비단 조각, 마지막 단서]

칠흑 같은 어둠 속, 강이현은 몸을 숨긴 숲에서 숨을 헐떡였다. 추격자들의 발소리는 멀어졌지만, 여전히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차가운 땅바닥에 주저앉아 품속의 비단 조각을 꺼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질 뻔했던 작은 조각에는 희미한 글자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의문의 여인이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건넨, 어쩌면 폐비의 생존과 왕실의 진실을 향한 마지막 열쇠일지도 몰랐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비단 조각을 펼쳤다. 단순한 지명이나 글귀 같지는 않았다. 복잡하게 얽힌 선과 점, 그리고 익숙지 않은 상징들이 뒤섞여 있었다. 의원으로서 인체의 경혈이나 약재의 특징을 그림이나 기호로 표현하는 데 익숙했던 강이현은 조심스럽게 비단 조각을 해석하려 애썼다. 선과 점의 배열이 특정 산맥의 형상 같기도 했고, 새겨진 문양이 고서에서 본 특정 문파나 은밀한 조직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서찰의 단서들, 매화 부인의 의미심장한 말, 주막 사내의 조언, 그리고 여인의 희생이 하나로 엮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단 조각의 비밀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한양 외곽 깊은 산속,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밀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은 오랫동안 잊혔거나, 혹은 감춰진 존재들이 숨어 지내는 곳일 터였다. 폐비가 살아있다면, 바로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진실이 눈앞에 다가오는 만큼, 위험도 커졌다. 이 장소를 아는 자는 극히 드물 것이며, 그들은 이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동원할 것이다. 강이현은 자신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에 접어들었음을 깨달았다. 미천한 의원이 왕조의 운명을 좌우할지도 모를 거대한 비밀의 한가운데 서게 된 것이다.

그때, 숲 저편에서 희미한 횃불 빛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김대감의 수하들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그를 추격하고 있었다. 더 이상 숨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강이현은 비단 조각을 품에 단단히 쥐고 몸을 일으켰다. 비단 조각이 가리키는 곳, 그곳을 향해 발을 떼는 그의 눈빛은 두려움 속에서도 결연한 의지로 빛났다. 알 수 없는 운명 속으로 뛰어드는 그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11화: 죽음의 기운, 비밀의 서찰]

조선 중엽, 검은 그림자처럼 역병이 한양을 덮쳤다. 거리마다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삶의 희망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허름한 뒷골목의 작은 의원, 강이현. 그는 이름 없는 자였으나, 생사를 넘나드는 병자들 곁을 지키며 꺼져가는 숨통에 희미한 불씨를 살려냈다. 그의 침과 탕약은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기적을 만들었고, ‘뒷골목의 명의’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병의 발톱은 기어코 왕실의 심장부까지 파고들었다. 어린 세자가 고열에 신음하며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에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내의원과 혜민서의 명의들이 총동원되었으나, 세자의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진 권세가들은 금단의 영역이라 여겼던 궁궐 밖 민간 의원들에게까지 시선을 돌렸다. 백성들 사이에 파다한 소문이 닿은 곳, 마침내 강이현에게 궁궐 입궐의 명이 떨어졌다.

살아있는 자보다 죽어가는 자의 기운이 더 짙게 느껴지는 곳. 궁궐은 화려함 속에 숨겨진 병색으로 가득했다. 웅장한 전각들 사이로 희미한 신음과 약재 냄새가 뒤섞여 흘렀다. 강이현은 낯선 위압감과 엄숙함 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내관을 따라 세자가 기거하는 동궁전으로 향했다.

동궁전에 들어선 순간, 차가운 공기가 그를 맞았다. 용상에 앉을 이의 거처라기에는 너무나 적막하고 위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강이현은 예의를 갖춰 세자의 침상 곁에 섰다. 창백한 얼굴의 세자는 고통 속에서도 무언가를 꽉 움켜쥔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강이현은 조심스럽게 진맥을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세자의 손목에 닿으려 할 때, 세자의 손에 들린 작게 접힌 종이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누군가에게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듯, 세자의 손아귀에 감춰진 그것.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병자의 물건이 아니라고. 강이현은 홀린 듯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낡고 바랜 종이에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원, 세자 저하의 용태는 어떠하오?”

[12화: 봉인된 진실]

“의원, 세자 저하의 용태는 어떠하오?”

등 뒤에서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에 강이현은 얼어붙었다. 손에 쥔 서찰이 뜨거운 인두처럼 느껴졌다. 황급히 서찰을 품속 깊이 찔러 넣으며 몸을 돌리자, 세자 곁을 지키는 내관 하나가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세자의 병세보다 강이현의 손끝 미세한 움직임에 더 집중하는 듯했다.

“아… 아직 위중하시나, 맥이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사옵니다.”

강이현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했다. 품속의 서찰 위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내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강이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세자의 얼굴을 힐긋 확인하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싸늘한 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강이현은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궁궐에 밤이 깊어지자, 동궁전은 더욱 적막해졌다. 강이현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품속의 서찰을 꺼내 들었다. 낡고 바랜 종이에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밀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수십 년 전 폐위되어 죽었다 알려진 왕비가 살아있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그녀의 생존을 둘러싼 거대한 왕실의 음모에 대한 조각난 단서들이었다.

폐비의 생존. 권력의 정점에 선 김대감 일파가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을 진실. 미천한 의원에 불과한 자신이 감히 알게 되어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 이 서찰을 손에 쥔 순간, 강이현은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깨달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단순한 종잇조각이 아니라, 조선 왕실의 근간을 뒤흔들 화약고의 불씨였다.

바로 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동궁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설마 벌써 눈치챈 것인가?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강이현은 서찰을 다시 품에 숨기며 탈출할 곳을 찾기 위해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위협 속에서, 그의 목숨을 건 사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13화: 어둠 속의 길, 첫 표식]

문밖에서 들려온 다급한 발소리는 순식간에 요란한 들이닥침으로 변했다. 육중한 문짝이 벌컥 열리며, 횃불을 든 무장한 병사들이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선두에는 김대감의 심복 내관이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강이현을 노려보았다.

“움직이지 마라, 의원! 세자 저하에게서 무엇을 훔쳤느냐? 순순히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다!”

목소리에는 추궁보다 위협이 앞섰다. 병사들은 이미 칼을 뽑아들고 강이현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서찰을 품에 숨긴 강이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미천한 의원인 그가 감히 칼날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사방이 막힌 동궁전 안에서 도망칠 곳은 없어 보였다.

“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저 세자 저하를….”

변명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병사 하나가 거칠게 그의 어깨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강이현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며 옆에 있던 작은 탁자를 발로 찼다. 탁자가 넘어지며 화려한 자기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찰나의 혼란! 강이현은 그 틈을 타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달음질쳤다.

동궁전 깊숙한 곳, 장식용 병풍 뒤쪽으로 숨어든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병사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절박한 순간, 그의 눈길이 우연히 낡은 벽면 한 곳에 닿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 벽돌 틈 사이에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아주 작은 표식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남긴 듯한 기묘한 문양.

무언가에 홀린 듯 강이현은 그 표식 주변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리고 문양 아래 특정 지점을 누르자,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벽돌 하나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틈이 드러났다. 숨겨진 통로였다. 궁궐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 통로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탈출구였다.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몸을 숙여 통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어둠 속 통로 안쪽에서 누군가 그의 발치에 무언가를 재빨리 던져주었다. 작고 묵직한 나무 토큰이었다. 차가운 나무 조각에는 벽에서 본 것과 같은 기묘한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토큰을 주워들기 무렵, 병사들이 병풍 뒤까지 다가와 외쳤다. “거기 누구냐!”

강이현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나무 토큰과 서찰을 품에 꼭 쥐고 어둠 속 통로 안으로 몸을 던졌다. 퀴퀴한 흙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살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등 뒤에서 병사들의 분노에 찬 고함과 벽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통로 끝에 다다라 비좁은 출구를 빠져나왔을 때, 그는 이미 궁궐 밖, 칠흑 같은 밤거리에 서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피던 강이현은 문득, 멀리 떨어진 주막 지붕 위 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형체를 발견했다. 궁궐을 벗어났지만, 사냥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14화: 어둠 속의 길잡이]

강이현은 퀴퀴한 흙먼지 냄새를 맡으며 비밀 통로에서 기어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그는 궁궐 밖, 낯선 한양의 밤거리 한가운데 서 있었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주위를 살폈다. 멀리 떨어진 주막 지붕 위, 그림자처럼 서 있던 인영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우연일까. 두려움과 함께 희미한 의문이 피어올랐다.

바로 그때, 등 뒤 궁궐 쪽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횃불 여러 개가 쏟아져 나왔다. “저기다! 의원 나부랭이를 잡아라!” 김대감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비밀 통로의 출구를 찾아낸 모양이었다. 사냥개처럼 끈질긴 추격에 강이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정신없이 내달리면서, 그는 품속의 서찰과 나무 토큰을 떠올렸다. 서찰에는 폐비의 생존과 관련된 단서들이, 나무 토큰에는 방금 전 그를 탈출시킨 누군가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주막 지붕 위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의 시야 끝에서 움직였다. 그 인영은 강이현을 직접 쫓는 대신, 복잡한 골목길 사이로 사라졌다 나타나며 마치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혹은 추격자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기만술일 수도 있었다.

강이현은 필사적으로 그림자를 쫓았다. 그자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혼란스러운 밤에 의지할 만한 유일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은 턱까지 차올랐고 다리는 끊어질 듯 아팠다. 그때, 그림자가 한 낡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강이현을 향해 손짓하며 작은 소리로 외쳤다. “표식을 보이시오! 여기로!”

그림자가 가리킨 곳은 허름한 창고 건물 옆의 좁은 문이었다. 강이현은 망설임 없이 품속에서 나무 토큰을 꺼내 들었다. 차가운 나무 조각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 그는 그것을 손에 쥔 채 문으로 다가섰다. 그때, 뒤따라오던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골목 어귀에서 횃불 빛이 번쩍이며 김대감의 수하들이 나타났다. “잡았다!”

강이현은 문 앞에서 발이 묶였다. 그림자는 이미 문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과연 이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안전한가? 아니면 함정인가? 추격자들은 이미 칼을 빼들고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15화: 그림자 속으로의 도약]

김대감 수하들의 고함 소리가 등 뒤를 덮쳤다. 칼날이 번뜩이는 것을 보며 강이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름한 창고 옆 작은 문으로 몸을 내던졌다. 육중한 나무 문이 쾅 닫히며 외부의 소음을 차단했다.

안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나무 향이 뒤섞여 코를 찔렀다. 숨을 헐떡이며 벽에 등을 기댄 그는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추격자들은 문밖에서 거칠게 문을 두드리거나 부수려 시도하는 듯했다. 쾅, 쾅, 요란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림자처럼 자신을 안내했던 존재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어둠 속 인영을 살폈다. 형체는 뚜렷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인영이 강이현의 코앞에 멈춰 섰다.

“표식은… 확인했다.”

나지막하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강이현은 품속에서 나무 토큰을 꺼내 내밀었다. 차가운 나무 조각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 인영은 강이현의 손에서 토큰을 가져가 손끝으로 문양을 더듬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밖에서는 여전히 추격자들이 문을 부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자네가… 세자의 손에서 그것을 얻은 자로군.” 인영이 말했다. 서찰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째서? 누구에게서? 강이현의 머릿속은 의문투성이였지만, 지금은 묻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왜 저를 도우시는 것이오?” 강이현이 용기를 내 물었다.

인영은 대답 대신 토큰을 강이현의 손에 다시 쥐여주었다. “지금은 알 때가 아니오. 다만… 자네 손에 든 그 서찰이 가리키는 진실의 길은 험난할 것이오. 이 표식을 따르는 자들을 조심하고, 동시에… 믿어야 할 수도 있소.”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덧붙였다. “폐비마마께서 남기신 마지막 단서는… 달빛 아래 세 갈래 길목 다리에 숨겨져 있소. 그곳에서 ‘상자’를 찾으시오.”

‘세 갈래 길목 다리’. 서찰에는 없던 구체적인 지명이었다. 폐비가 남긴 상자라니? 강이현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그것이 폐비의 생존을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일 수도 있었다. 문밖의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이리로.” 인영은 강이현의 팔을 잡고 어둠 속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낡은 상자들이 쌓인 구석을 지나자, 작은 틈이 나타났다. 비좁고 어두운 공간 너머에서 희미한 밤공기가 느껴졌다. 또 다른 비밀 통로였다. “이 길로 가면 개울가로 나갈 수 있소. 추격자들을 따돌리고… 세 갈래 길목 다리로 가시오.”

강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영은 더 이상 말없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강이현은 품속의 서찰과 나무 토큰, 그리고 새로운 단서를 떠올렸다. 세 갈래 길목 다리… 그곳에 폐비의 상자가 있다면…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것일 터였다. 문을 부수는 소리가 절정에 달했다. 강이현은 망설임 없이 몸을 숙여 비좁은 통로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둠과 미지의 위험 속으로 향하는 그의 여정은 계속되었다. 과연 세 갈래 길목 다리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16화: 달빛 아래 숨겨진 상자]

강이현은 좁고 퀴퀴한 통로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물 냄새와 함께 축축한 기운이 코를 찔렀다. 그는 개울가 비탈진 곳에 쓰러지듯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등 뒤 창고 쪽에서 들리던 추격자들의 요란한 소음은 이제 희미한 메아리처럼 멀어졌다. 간신히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미지의 세계로 내던져졌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품속에는 세자의 서찰과 의문의 나무 토큰이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그림자 같은 조력자가 건넨 ‘달빛 아래 세 갈래 길목 다리에서 상자를 찾으라’는 새로운 단서. 세 갈래 길목 다리… 한양 외곽에 있는 낡은 다리였다.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추격을 잠시 피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곳에 폐비와 관련된 ‘상자’가 있다는 말인가?

강이현은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개울물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비우고 오직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발을 놀렸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길은 더욱 희미해졌지만, 하늘에 뜬 달빛이 그의 길을 은은히 밝혔다. 얼마나 달렸을까, 낡은 다리의 실루엣이 저만치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세 갈래 길목 다리에 도착했다. 낡은 돌다리 아래로는 검은 물이 고요히 흘렀다. 강이현은 다리 밑으로 내려섰다. 조력자의 말대로 달빛은 다리 교각 아래 특정 부분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정확히 그 부분만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달빛이 닿는 곳을 살폈다.

낡고 이끼 낀 돌들 사이, 다른 돌과는 미묘하게 다른 틈새가 눈에 들어왔다. 강이현은 떨리는 손으로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힘을 주어 돌을 들어 올리자, 그 아래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폐비가 남겼다는 상자.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진실의 열쇠일까? 강이현은 상자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상자에 닿으려는 순간,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상자에 손대지 마라.”

강이현은 얼어붙었다. 돌아보자, 달빛 아래 그림자처럼 서 있는 인영이 보였다.

[17화: 달빛 아래, 비단 조각의 속삭임]

“그 상자에 손대지 마라.”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강이현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낡은 나무 상자에 닿으려던 손을 멈춘 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달빛이 옅게 흩뿌려진 다리 아래 그림자 속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검은 옷에 얼굴은 깊은 후드 아래 가려져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늙었는지 젊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날카로운 기운만이 주변 공기를 에워쌌다.

인영은 천천히 강이현에게 다가왔다. 발소리 하나 없이 유령 같았다. 강이현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며 상자 앞에 선 채 몸을 굳혔다. 그는 미천한 의원일 뿐, 이런 상황에 대처할 무력(武力)은 없었다.

“어떻게… 이곳을 알고 온 것이냐? 그리고 네놈은 누구냐.”

목소리는 낮고 절제되어 있었으나, 숨길 수 없는 경계심과 의심이 배어 있었다. 강이현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의원입니다. 세자 저하를 진료하다 우연히 서찰을 얻게 되었고… 그 서찰의 단서를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가면 속 눈빛인지, 어둠 속 시선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인영은 강이현의 눈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강이현의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었다.

“서찰이라… 폐비마마께서 남기신 그것 말이군.” 인영의 말에 강이현의 동공이 미세하게 확장되었다. 이자는 서찰의 존재뿐 아니라 그것이 폐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그 상자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폐비마마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것.”

인영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상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함께, 강이현에 대한 의심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자네가 진실로 서찰을 따르는 자인지… 시험해 보겠다.” 그는 손을 들어 상자를 가리켰다. “상자를 열어보아라. 그리고 그 안의 것이 무엇인지 내게 말해보시오. 만약… 폐비마마께서 원하신 자가 아니라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목숨을 건 시험이었다. 강이현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에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살피자, 낡은 나무결 사이 숨겨진 작은 걸쇠가 보였다. 그것을 누르자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상자 안에는 몇 점의 낡은 패물과 함께, 접혀 있는 **작은 비단 조각** 하나가 들어 있었다.

강이현은 비단 조각에 손을 뻗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비단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자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비단 조각을 집어 드는 순간, 인영에게서 깊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결국… 그 비단이 거기 있었군.”

바로 그때였다. 멀리서 수십 개의 횃불이 어둠을 가르며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횃불 행렬은 개울가를 따라 다리 밑으로 향하고 있었다. 김대감의 추격자들이었다. 그들은 끈질기게 강이현의 뒤를 쫓아 이곳까지 당도한 것이다. 인영은 횃불 무리를 보더니 표정을 굳혔다.

“시간이 없다. 자네는 저 비단 조각을 가지고 도망치시오!” 인영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추격자들을 향해 달려 나갈 태세를 취했다. “비단 조각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폐비마마의… 그리고 이 나라의 운명을 바꿀 열쇠일지도 모른다!”

강이현은 비단 조각을 움켜쥐었다. 뒤에서는 추격자들의 고함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눈앞에서는 의문의 인영이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의원의 손에 들린 이 작은 비단 조각은 대체 무엇이며, 어디로 이끌려는 것인가?

[18화: 비단 조각의 무게]

다리 아래를 비추던 달빛은 순식간에 수십 개의 횃불 빛에 잠식되었다. 김대감의 추격자들이 사나운 기세로 개울가를 따라 몰려왔다. 의문의 인영은 망설임 없이 검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횃불 무리를 향해 달려 나갔다. 칼 부딪히는 쇳소리와 고함, 비명 소리가 뒤섞이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어서 도망치시오! 비단 조각을 가지고!” 인영의 다급한 외침이 혼돈 속에서 강이현의 귓가에 박혔다. 그의 손에는 낡은 상자에서 꺼낸 작은 비단 조각이 쥐여 있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언뜻 보았던 비단 조각의 글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것이 폐비마마께서 남긴 마지막 열쇠라 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강이현은 의문의 인영이 만들어준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차가운 개울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물살이 그를 감쌌지만,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놀렸다. 뒤에서는 여전히 처절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처럼 나타나 자신을 도왔던 인영의 희생이 그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개울을 따라 한참을 내려온 강이현은 낡고 허물어진 작은 암자 근처에 이르러서야 겨우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온몸이 젖어 추위에 떨렸지만, 추격자들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적 없는 암자 구석에 몸을 숨긴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품속에서 비단 조각을 꺼냈다.

젖어서 구겨질까 염려했지만, 비단 조각은 여전히 튼튼했다. 횃불을 켜기엔 위험했기에, 강이현은 희미한 달빛과 밤하늘의 별빛에 의지하여 비단 조각을 펼쳤다. 언뜻 보기에 아무렇게나 새겨진 듯했던 선과 점, 기묘한 상징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지도가 아니었다. 뭔가 복잡한 암호 같았다.

의원으로서 인체의 경혈이나 약재의 조화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했던 강이현은 집중해서 비단 조각을 살폈다. 곧 특정 방향과 장소를 가리키는 듯한 몇 가지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의 산맥을 형상화한 것 같기도 했고, 특정 사찰의 배치를 그린 것 같기도 했다. 비단 조각에 새겨진 암호는 폐비가 숨어 지내고 있다는 은밀한 장소를 가리키는 마지막 단서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해독하면 할수록 비단 조각은 더 깊은 수수께끼를 드러냈다. 단순한 장소만이 아니었다. 특정 시간, 특정 조건, 혹은 어떤 ‘징표’를 가진 자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암시가 담겨 있는 듯했다. 이 비단 조각은 그가 단순한 의원에서 벗어나, 거대한 비밀의 문을 열기 위한 열쇠이자, 동시에 엄청난 위험의 시작을 알리는 징표였다. 그는 비단 조각을 손에 쥔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이 조각은 그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그리고 그곳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19화: 비단 조각, 마지막 행선지]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강이현은 낡은 암자 처마 밑에 몸을 웅크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은 개울물에 젖어 떨렸지만, 그의 모든 감각은 손에 쥔 작은 비단 조각에 쏠려 있었다. 의문의 여인이 자신을 구해내며 넘겨준, 폐비마마의 마지막 단서라 했던 그것.

희미한 달빛 아래 조심스럽게 펼친 비단에는 정교하지만 알아보기 힘든 글자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단순한 암호가 아니었다. 산세의 형상 같기도 하고, 특정 건물의 배치 같기도 했다. 의원으로서 약재의 속성이나 인체의 경혈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했던 강이현은 비단 조각을 집중해서 살폈다. 그의 의학적 지식과 직관을 총동원하여 선과 점의 의미를 더듬어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단 조각의 감춰진 뜻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것은 놀랍게도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골, 지도에는 표기되지 않은 은밀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랫동안 세상에서 잊혔거나, 혹은 철저히 숨겨진 이들을 위한 곳일 터. 폐비마마가 살아 계시다면, 바로 그곳에 계실 가능성이 높았다. 진실의 문이 눈앞에 열리는 동시에, 엄청난 위험이 감지되었다.

이 장소의 비밀을 지키려는 자들은 기필코 그를 막으려 할 것이다. 바로 그때, 숲 저편에서 희미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횃불 빛이 어둠을 가르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김대감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그의 뒤를 쫓아왔다.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었다.

강이현은 비단 조각을 품에 단단히 쥐고 몸을 일으켰다. 비단 조각이 가리키는 마지막 행선지, 그곳으로 향해야만 했다. 알 수 없는 운명 속으로 발을 내딛는 그의 눈빛에 결연함이 스쳤다. 과연 그 은밀한 장소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20화: 산중(山中)의 비밀, 새로운 길목]

차가운 산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강이현은 김대감의 수하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신없이 산길을 올랐다. 낡은 암자 근처에서 몸을 숨긴 그는 비단 조각을 다시 꺼내 들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비단에 새겨진 문양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지난밤, 추격자들의 발소리를 피해 필사적으로 해독한 결과, 비단 조각은 한양 외곽 깊은 산중에 숨겨진 은밀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의원으로서 익힌 인체의 경혈도나 약초의 형태를 조합하는 방식이 비단 조각의 복잡한 기호를 푸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산세의 흐름, 특정 봉우리의 위치, 바위의 형상 등이 어우러져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폐비마마께서 남기신 마지막 단서. 진실이 잠들어 있는 곳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장소일 터였다. 강이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단 조각을 품에 넣었다.

발밑에는 추격자들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 후퇴란 없었다. 폐비마마의 생존, 왕실의 거대한 음모… 이 모든 진실의 실마리가 저 산중에 있을 것이다. 비단 조각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험준한 산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날카로운 바위에 손이 베였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미천한 손에 쥐어진 비단 조각이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닌, 자신의 운명과 이 나라의 진실을 담은 무게임을 절감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 비단 조각에 그려진 특정 산세와 일치하는 봉우리와 계곡이 눈앞에 나타났다. 거의 다 온 것인가? 강이현은 숨을 죽이고 비단 조각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살폈다. 그리고 비단에 새겨진 문양 중, 예상치 못한 표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단순한 지형 표시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동시에 이 장소를 지키는 이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은밀한 ‘징표’ 같았다. 바로 그때, 산 정상으로 향하는 좁은 길목 어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강이현은 황급히 몸을 숨겼다. 숲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김대감의 수하들이 아니었다. 낯선 복색을 한, 단단한 기세의 무리였다.

그들은 예리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강이현이 찾던 은밀한 장소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은 왜 이곳에 온 것인가? 강이현은 비단 조각의 마지막 징표와 마주하며 얼어붙었다. 자신이 도착한 곳은 진실의 문턱인가, 아니면 더 깊은 함정인가?